노마드 뷰

덕유산 자락에서 51년 부산을 회상하다 본문

Life

덕유산 자락에서 51년 부산을 회상하다

노마드 뷰 2018. 6. 8. 21:26

덕유산 자락에서 51년 부산을 회상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동족상잔(同族相殘)으로 기록된 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은 피난민들이 몰려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해 1.4후퇴 이후 부산의 인구는 100만을 돌파한다. 주택사정이 심각해 산비탈, 공지, 하천변 심지어 남의 집 마당에까지 피난민들의 움집과 판잣집들은 파고든다. 움막이나 판잣집조차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천에서 잠자리를 해결해야 했다.

 

 

“당시 부산의 거리는 피난민 무리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공포와 죽음과 혼란이 뒤섞여 춤추고……. UN군들의 왕래와 전선으로 나아가는 힘찬 청년들의 모습! 피난 살림에 갈증을 만난 민간인! 총, 칼, 싸움, 죽음, 상이군인, 학원, 친구, 도적, 살인, 강도……. 정말 혼란의 파도 그것뿐이었다.”(‘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위에’, 학생신앙운동사, 2013)

이때의 한국전쟁을 다룬 홍성원의 대하장편소설 「남과 북」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1년의 부산은 지금 지난여름에 이어 두 번째의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전국 각지에서 무수한 난민들이 홍수처럼 밀려든 것이다. 전선과는 수백 킬로의 거리가 있었으나 이곳에도 역시 전쟁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있다. 거리에서 가끔씩 발견되는 거적이 덮인 행려병자의 수척한 시체들, 굴뚝을 쑤신 듯이 새까맣게 때가 낀 채 행인에게 손을 내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고아들, 장사라고는 생전 처음 해보는 듯한 해맑은 얼굴의 수줍음 잘 타는 젊은 아낙네들, 오직 몸뚱이밖에 팔 것이 없어서 입술에 새빨갛게 루주를 칠하고 외국 병사들에게 서툰 영어로 말을 건네는 젊은 여인들…….” 당시의 부산은 그야말로 아수라였다.

 

이 비극의 와중에서 한국의 일부 지도층들은 부산항에 배를 대놓고 여차하면 일본으로 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을 지시했던 강문봉 장군의 회고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육본에서는 김익렬 대령에게 헌병 1개 소대를 주어 부산항만 일대의 선박에 대해서 수색토록 했다. 유명 정치인과 고위 장성까지 붙들려 왔는데 이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채 염탐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령급 이상 8명이 체포됐다.” 또 일본으로의 밀항이 성행해 밀항 주선 비용이 1인당 50만원(1950년경 100원은 지금의 1000~1500원; 당시 미국 돈 0.03달러와 교환)에서 나중에는 100~150만원으로 뛴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나만 살겠다는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전장의 폐허에서도 꽃은 피어나듯 먼 땅 미국에서 전쟁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조국으로 달려온 유학생도 있었다. 동료 학생들과 교수의 완강한 만류를 뿌리치고 돌아온 그는 미국인들이 모금해준 5000달러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복음진료소를 세운다. 1951년 1월 부산시 남항동 제3영도교회 내에 세워진 무료 복음진료소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 1951년 12월 20일 영선초등학교 옆 넓은 공터로 옮겨야 했다. 신학을 전공한 그는 이 곳에 3동의 천막을 치고 의료진들을 독려하며 피난민 구호와 지역의료 활동, 농어촌 순례 진료 등 복음에 전력을 다 한다. 당시 한국의 성자로 불리운 장기려 박사가 제2대 원장(1951.07.02)을 지내기도 한 이 진료소는 후에 부산 복음병원과 고신대 의과대학으로 재탄생한다.

 

운명이였을까?

그는 복음진료소를 운영한지 3여년이 지났을 즈음 의례 선각자들이 그리했듯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진료소를 떠나야 했다.

 

몇 년 후…….

그는 대학 부총장 자리를 마다하고 쓰러져가던 시골 학교를 맡아 그 학교를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학교 반열에 올려 놓는다. 그 학교가 인성 교육으로 유명한 오늘의 거창고등학교다.

힘든 시절 당대의 필요와 요청에 기꺼이 순종한 사람, 각자의 색깔과 모양으로 거침없이 피

어나라고 가르친 사람, 시대의 길잡이...

그 분이 바로 건국 이후 최초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한 전영창 선생님(1917~1976)이시다.

 

<전영창 선생님 기사 바로가기>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남덕유산 자락에 깃든 오래된 이 마을은 장수 마을로 이름난 곳이다. 맹숙희 김종렬 부부는 89세 동갑으로 1995년 진주에서 이 곳 대남리로 귀향했다. 두 분은 1951년 부산 무료 복음진료소에서 만나 결혼했다. 당시 맹숙희 여사는 전영창 선생의 요청으로 간호장교 중위로 예편해 진료소 간호사로 헌신하고 있었고, 김종렬 선생은 한양 공대 4학년 재학생이었는데 이 진료소에 봉사활동을 자주 나왔다고 한다.

 

신록이 눈부신 날, 부산 진료소 옆 텐트에서 한 식구처럼 몇 년을 동고동락한 맹숙희 여사와 전영창 선생의 자제 분인 전성은 거창고등학교 이사장이 만났다.

 

맹숙희 여사는 격정에 못 이겨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 분(전영창)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신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떠나셨지요. 그 때 그 분을 따르던 우리 간호사들도 다 따라 나왔지요.”

“60년간 쌓인 이 한을 꼭 증언하고 가야지 했어요.”

“나이 들어 생각하니……. 전영창 선생님 같은 좋은 분 만난 게 보람이지, 물질적인 거 소용이 없더라. 어떤 정신으로 사는 게 중요하지…….”

 

호국의 달 6월이다.

36년간의 치욕을 견디고 마침내 맞은 해방,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고 극심한 좌우의 갈등 속에서 파괴와 학살의 전쟁은 기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인민해방’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처참했다. 그 고통은 당대의 민중들이 고스란히 짊어지고 견뎌 내야하는 천형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준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선한 의지를 가진 헌신적인 우리 이웃들 이었다.

오늘, 그 분들을 만났다.


글/사진  이종헌

 

  


 ▶맹숙희 여사(1930.02.25일생)



 ▶맹숙희 김종렬 부부와 전성은 거창고 이사장(왼쪽)



▶맹숙희 여사와 전성은 이사장은 전 이사장이 부산 영선초등학교 2학년~5학년 때까지 병원천막에서 함께 지냈다.



▶김종렬 선생은 1993년 진주교대 교수직을 퇴임하고 1995년도에 고향인 이 곳 대남리로 귀향했다.



▶맹숙희 여사는 복음진료소를 그만둔 후 1965년 사천에서 '맹조산소'를 개업해 운영하다 사천농고에서 진주교대로 직장을 옮긴 남편을 따라 1965년에 진주로 온다. 맹숙희 여사가 95년 조산소를 그만둘 때까지 평생 4만명의 아이를 받아낸 기록이 담긴 노트를 자랑스레 펼쳐 보이고 있다. 진주시와의 통합으로 지금은 그 지명이 사라진 '진양군'이라는 글씨도 보인다.



▶ 맹숙희 여사는 2013년 국가로부터 호국영웅기장증을 수여 받았다.



▶ 김종렬 선생의 교수임용장.




▶ 자택 정원에 나란히 앉은 부부의 표정에서 오랜 시간이 길르낸 지혜와 여유, 묵직한 삶의 경건함을 본다.


▶ 오랜 역사를 가진 대남교회에서 매일 새벽기도를 올리신다는 두 분, 평화가 가득 하시길...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화가 이호신 화백  (0) 2018.04.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