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뷰

유달산에 남긴 일제의 흔적 본문

Culture /테마기행

유달산에 남긴 일제의 흔적

노마드 뷰 2018. 5. 15. 10:49

<테마기행>.3

유달산에 남긴 일제의 흔적


<목포는 항구다>. 이난영의 친 오빠인 이봉룡이 쓴 이 곡은 전편인 <목포의 눈물>에 나왔던 지명과 정서가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리고 목포는 항구라는 내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목포는 항구다. 항구며, 안개 속에서 기적이 우는 곳,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이별의 슬픔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목포는 항구다에는 항구가 뜻하는 한과 꺾이지 않는 저항의식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은 정신이 노래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유달산의 유선각은 <목포의 눈물>이 발표되기 3년 전에 세워졌다. 개항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1935, 목포는 이난영을 통해 삼백년 원한을 왜 다시 되새김질 하고 있었던 것일까? 유달산에 그 답이 되는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오포

유달산에 있는 오포. 정오에 포를 쏘아 시각을 알렸다는 것인데, 최초의 오포는 조선식 선입포였다. 그러나 1913, 총독부는 오사카의 포병공장에서 생산된 일제포로 바꾼다. 이것이 그 첫 번째 흔적. 유달산을 알리는 표지석에도 그 흔적이 있다. 유달산 해발 228미터. 미터가 쌀자로 표기 되어 있다. 이것 역시 일본식 표기이다. 그러나 오포와 쌀미자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곳에 이르면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달산 정상이다. 정상의 바위 이름은 일등바위고, 정상은 언제나 제왕의 자리였다. 그리고 바위는 늘 신성했다.

부동명왕상

그런데 이곳에서 눈 부릅뜨고 있는 것은 부동명왕상이다. 부동명왕. 타오르는 불꽃 속에 들어 앉아 있는 이것은 대일여래가 악마를 항복시키기 위해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른 손에 항마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쇠줄을 쥐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 밀교 도상이다. 유달산 정상에 일본 밀교의 부동명왕이 버티고 서서 목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그 어디에도 이토록 선명하고 화려하게 채색된 불상은 없다. 1920년경 새겨진 이 부동명왕은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뀐 것을 잊고 있다.

유달산 신사

근처에 바위에 새겨진 유달산 신사. 이 선명한 다섯 글자는 일제가 이곳에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목포의 애국심이 애써 지워버린 신사의 , 그러나 가슴에 새겨진 것까지 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홍법대사상

부동명왕상 오른 쪽에는 홍법대사상이 있다. 홍법대사는 일본 불교 진언종의 시조다. 일본불교의 상징적인 존재인 셈이다. 이외에도 유달산에는 일본 불교의 불상이 여든 여덟 기가 더 있었다. 유달산이 온통 일본 불교의 사원이었던 셈이다. 눈 부릅뜨고 있지만, 부동명왕을 섬기는 이는 이제 없다. 유달산에는 이미 그가 항복 시켜야할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밤낮없이 눈 부릅뜨고 내려다보지만, 목포는 더 이상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 부릅뜬 채 지난 역사를 의아해 하고 있을 뿐이다. 유달산의 정상은 여전히 제왕의 자리이고, 바위는 신성하다. 그들은 이제 지난 역사를 알리는 소품에 불과할 뿐이다.

목포는 누군가 강제로 문을 열게 하지 않았다. 1897년 스스로 개항하고 변신한 자주적인 항구 도시였다. 그러나 1906년 일본은 각국 거류지를 관리하는 권한을 박탈한다. 그후 일본 자본이 목포항을 통해 들어와 영산강 유역에서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곳곳에 일본 제국주의의 자취가 남게 된다.

 

.사진 : 루덴스 dlaudgod@gmail.com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