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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골, 삼의당 김씨 - 조선의 자유로웠던 영혼.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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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골, 삼의당 김씨 - 조선의 자유로웠던 영혼.1

노마드 뷰 2018. 9. 6. 12:30

* 새로운 이야기, 

<조선의 자유로웠던 영혼, 남원의 '삼의당 김씨'>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1786년 봄 어느 날, 남원 유천마을.

혼례식을 끝내고 하객들을 물리친 첫날 밤,

종이와 붓에 먹을 갈아 놓고, 이제 막 부부가 된 두 사람이 다시 은밀한 언약식을 갖는다.

서로 묻고 답하여 적어 둔 것이다.

 

신랑이 먼저 묻는다.

 

종신(終身)토록 나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아비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따를 수 있다는 것이오?”

 

그 질문에 신부가 미소를 흘렸을까, 잠시 후 입을 열어 답한다.

 

()나라 사정옥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부의 도는 오륜(五倫)을 두루 겸한 것으로

아비에게는 간언(諫言)하는 아들이 있고,

임금에게는 간쟁(諫爭)하는 신하가 있으며,

형제는 서로 정도(正道)로써 권면하고,

붕우는 서로 선행으로 권유하니

어찌 유독 부부 사이만 그렇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즉 제가 낭군을 어기지 않겠다고 한 것이

어찌 지아비가 잘못하는 것을 따르겠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열여덟 살 신부였지만, 당찬 기운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신랑은 17691013, 남원 교룡산 서남 기슭 서봉방에서 태어난 담락당 허립,

신부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던,

이름 없이 당호만 전해지는 삼의당 김씨였다.

이 초야의 에피소드는 김삼의당의 예성야기화(禮成夜記話)에 나오는 얘기다.

 

결혼 첫날 밤 나눈 것이라 해도 두 사람만의 얘기였다면

신부의 기세가 그다지 넘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삼의당은 세상에 내보이기 위한

자신의 문집에 이 글을 실었고, 그 때는 18세기 조선이었다.

삼의당이 자신의 문집에 이 글을 실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말한다.

 

부인은 경서와 사기 윤리 시경 소학

그리고 역사서나 대강 읽어서 그 뜻을 통하고,

여러 집안의 성씨 조상의 계보 역대 나라의 이름

선현의 이름이나 알면 족할 뿐,

허탕하게 시조를 지어 외간에 퍼뜨려서는 안 된다.”

 

이덕무는 당시를 대표할 만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학자였다.

그러나 그런 이덕무조차 여성교육에 대해

너그럽지 않았던 조선 후기였다.

 

그렇지만 김삼의당은 자신의 문집에 쓴 서문에서

이덕무의 여성교육관을 비판적으로 인용하고,

그 뒤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후, 친교가 아름답고 밝아져

인재와 큰 선비가 많이 나오고 민요가 성하게 되니,

어진 아녀자들도 잇따랐다.

나라의 고을마다 태평가가 끊이지 않아

시골 규녀자들까지도 흥겹게 교화되어

예와 문물이 볼품이 많아졌다.

나 또한 호남 구석의 한 여자로 깊이 묻혀 자랐고,

널리 경사를 배우지 않았을지라도

소학언해로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제자백가를 섭렵했다.

글을 구사함에 있어서 어찌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겠는가?”

 

신사임당 송덕봉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 같은

기라성같은 여성 문인들이 대거 출현했던 16세기.

 

흔히 조선시대는 엄격한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여성의 삶을 옥죈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후기의 모습일 뿐이다.

16세기 조선 사회는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진

자유로운 생활방식과 새로운 지배철학으로 들어선

주자학적 세계관이 치열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성리학이 강조하는 남녀차별이나 부부유별이

아직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동계만록에서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죽은 뒤에도 장가들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이미 칠남매가 있습니다.

그러니 또 자식을 두겠다고 예기에서

가르친 것을 어기시겠습니까?”

 

비록 기생이었지만, 몸 치장을 일삼지 않고

시정의 천한 족속들과는 상종하지 않았다는 황진이.

 

자신의 글재주를 임금이 알아주길 바랄 정도로

자부심 넘쳤고,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졌던

미암 유희춘의 아내 송덕봉.

 

방탕한 느낌까지 전해지는 시를 남겼던

자유로운 영혼 허난설헌.

 

화장품 냄새나 풍기는 부인들의 시를 초월한다'

평가 받았던 이옥봉.

 

그러나 그들은 선구자였고,

보수적인 학자들의 눈에는 모난 돌이었다.

허난설헌은 늘 남편과 불화로 외로웠고

홍대용을 대표로하는 남성들의 중상모략으로 상처받았다.

그리고 남편을 스스로 선택했던 여장부 이옥봉도

고통스러운 말년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삼의당 김씨


17691013, 삼의당 김씨와 담락당 허립이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났던 남원시 유천마을


남원 교룡산성, 이 산 아래에 유천 마을이 있다. 


노마드 뷰취재부 dlaud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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