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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이호신의 그림편지

여섯 번째 - 산다는 것은 꽃소식을 듣는 일 - 화첩 속의 '매화'

노마드 뷰 2019. 3. 5. 08:26

 이호신의 그림일기 6. 
 
산다는 것은 꽃소식을 듣는 일 
- 화첩 속의 '매화'

 

 

 

 

 

지난 겨울 독서 중 인상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凌壺觀 李麟祥 書畵評釋)1.2(박희병 지음돌베개, 2018)입니다.

이인상(1710~1760)은 개인적으로 매우 존숭해 온 조선의 서화가로 늘 제 마음에 자리 잡고 있지요.

그런데 특별한 이 책은 저자의 20여년에 걸친 노작으로 지금껏 연구한

이인상의 모든 것(작품과 생애)을 망라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림과 서예는 물론 특별히 매화를 숭상하고 아낀 대목에 밑줄을 긋고

그의 독백을 들으며 새 봄을 기약하고 싶었습니다.

    

 

    아이슬이 서리로 변해 초목이 시들고,

​    눈이 내려 음기(陰氣)가 여러 겹 쌓여 있을 때에 매화가 비로소 피는데,

​    깨끗하여 때가 끼지 않고 미미한 양기(陽氣)를 뿜어내어 마치 천지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    그리하여 지사(志士)나 유인(幽人;은자를 일컫음)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흐느껴 울게 하다가 결국에는 웃으며 노래하게하니,

​    비록 미미한 한 그루 나무이고 차가운 한 조각 꽃이기는 하나

    썩은 선비의 흉중(胸中)을 깨끗하게 씻고쇠퇴한 운수를 힘껏 만회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    매화는 정고(貞固)한 본성과 빼어난 덕을 지니고 있으니

    아무리 높이고 애호하며 벗으로 삼는다 해도 지나친 일이 되지 않는다.

​    매화를 아는 사람으로 나만한 이가 없고,

​    매화 또한 한사(寒士)에게 어울린다.

                                                              (1권 회화,<묵매도>해설 851~852)

    

 

이렇듯 이인상은 자신이 매화의 지기(知己)매화의 성품은 자신과 같다고 여기니

고절한 기상의 서화가였음을 알게 하지요.

그는 생애에 걸쳐 매화를 통한 사연으로 만남과 이별결의와 회포를 글로 많이 남겼습니다.

 

저 또한 지난날 매화탐사와 순례를 지속해 온바 화첩에 담은 매화는 해를 거듭했지요.

봄이면 늘 홀로 매화를 찾아 떠돌며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특별이 이번 봄맞이는 화첩을 접고 오는 인연들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유난히 봄볕이 성급해진 나날 속에 2월 마지막 날(2019.2.28) 오전10,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山天齋)에 지인들이 모였습니다.

소위 매화소풍의 첫 감상매로 <남명매>(南冥梅)를 완상하기 위해서지요.

참가자는 다양한 지역에서 모였고길라잡이를 자청한 제가 오늘의 머슴입니다.

 

매화향기 그윽한 선비의 고장,

산청에 심은 정신문화의 현장을 찾아 새봄을 맞이하고 만끽하자고 만든

산청3’ 리플렛(산청군 제작)을 나누며 모두 매화를 바라봅니다.

그윽한 향기 속에 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선생의

지조와 결의에 찬 선비의 생애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 생전에 친히 심으셨다는 매화는 벌써 만개한 상태입니다.

소풍일행은 이어 단성면 운리의 단속사터를 향하니 <정당매>(政堂梅)를 찾아서입니다.

강희안(姜希顔,1410~1464)이 지은 양화소록(養化小錄)에서

조부인 정당문학(政堂文學)의 벼슬을 지낸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심었다고 증언하고 있지요.

이 매화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매화각(梅花閣)을 보유한 곳으로

1999년 고사(枯死)한 후 씨를 배양한 후계목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저와는 특별한 시절인연으로

나무가 죽기 전 해(1998)에 정당월매(政堂月梅)’를 제작한 사연이 있지요.

이 일을 계기로 매화를 찾아 떠돌았고

훗날 산청으로 귀촌하게 된 사유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일행에게 그날의 추억을 들려주고 인근의 남사마을(남사예담촌)으로 향하니

산청3매의 마지막인 <원정매>(元正梅)의 친견입니다.

이 매화는 남사마을의 입향조(入鄕祖)로 알려진

원정공(元正公)하즙(河楫,1303~1380)선생이 심은 것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랜 7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그러나 이 매화의 원목도 수년전에 고사하여 현재는 손자목이 홍채를 뿌리고 있습니다.

꽃망울과 반개(半開)한 꽃을 보며 일행은 봄처녀의 설렘과 새날의 의지를 나누고 함께 사진도 찍습니다.

오늘의 이 뜻 깊은 만남에 감읍하며.

때가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점심 후 마을 이씨고가(李氏古家마당에 높이 자란 매화를 찾았어요.

훤칠한 기품을 보여주는 고매(古梅한 그루의 기상을 만끽하며

주인(‘풀꽃누리’)이 내준 녹차와 다과를 음미하는 풍류의 시간!

꽃이 지기 전 달밤에 찾아와서 월매(月梅)를 우러르며 곡차를 나누고픈 마음이 새록새록 일어납니다.

 

이제 마을돌담길을 따라 저의 작업실인 오늘화실에 이릅니다.

담장 안에는 마을에서 가장 일찍 핀 홍매가 일행을 맞아주니 모두들 반색합니다.

저는 그 마당에서 작은 바위 옆에 자란 연분홍 매화 앞에 돗자리를 깝니다.

그리고 아내가 준비해준 꽃잎을 띄운 매실차를 공양하고 절을 올립니다.

이어 발원문을 낭독합니다.

사연인 즉 이렇습니다.

    

 

     <원정매 후계목 4년생 식수 발원문>

 

     봄볕이 완연한 지리산골 하늘아래에서 청명한 길일을 맞이하여 천지신명께 아룁니다.

​    그리고 일찍이 지리산자락 니구산 아래 터를 잡고 가솔들을 이끌고 정착하신

    원정공(元正公)하즙(河楫1303~1380)선생의 영혼에 절 올립니다.

    지리산 강줄기에 인접하여 700여 년 간 온갖 전란에도 무탈하게

    선비정신을 이어 온 복지가 오늘의 남사마을(남사예담촌)입니다.

​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이신 선생께서는 당시에 연분홍(겹홍매매화 한 그루를 친히 심으시고

    그 뜻을 영매시(詠梅詩)로 남기셨습니다.

 

    집 양지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피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그 후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원목은 고사 하였으나

     손자목이 대를 이어 여전히 꽃피우고 있습니다.

​    더불어 이 매향의 참뜻을 나누고자

    강호철 교수(경남과학기술대학 조경학과)께서 4년 전 원정매의 열매를 거두고 생장시켜왔습니다.

​    이리하여 마침내 어엿한 4년생 묘목이 되었기로

    저의 오늘화실 뜰에 식수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    강교수님의 이 특별한 매화사랑과 큰 뜻을 이곳에 뿌리내리오니

    천지신명과 지리산의 영령들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기록상 국내에서 최고의 매화로 칭송받고,

​    고절한 선비정신으로 추앙받는 원정매의 새 손자목이 모쪼록 잘 성장하기를 발원합니다.

​    그 맑은 영혼의 숨결이 해마다 꽃을 피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향기가 되게 하소서.

​    또한 이곳에 인연 닿는 모든 이들에게 존중과 사랑받기를 기원합니다.

​    대대손손 마을의 역사와 함께 꽃피우기를 원하기에 향 사르고 잔 올리며 절합니다.

 

                                정유년 우수 이튿날(음력 정월 23서기 2017.2.19.)

                                남사예담촌 오늘화실 주인은 절하고 올립니다

    

 

2017년 봄에 식수한 매화는

어느덧 의젓한 형태를 갖추고 연분홍빛의 꽃을 피우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는 그날 일기에 이 사연과 함께한 만남을 후기로 남겼지요.

    

 

    ...이 모든 시절인연이 오늘 심은 원정매’ 후계목 덕임은 물론이다.

​    이 뜻 깊은 날을 기리고 기념일로 정해 매해마다 만나 뜻과 풍류를 즐기는 일도 좋으리라.

​    해마다 이 날짜에 모여서 매화에 인사하고 잔에 꽃잎을 띄워 매화음(梅花飮)을 즐기는 일!

​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기쁜 마음이다.

​    오늘 모인 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여기에 기록해 둔다.

    

 

어쩌면 이에 대한 실천의지가 오늘의 매화소풍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서 함께한 지인들이 모두 반갑고 고마운 인연입니다.

그리하여 아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화실뒤란 대숲(산청아트샵/지금이 꽃자리으로 지리를 옮겨 매화음을 즐깁니다.

꽃병의 홍매와 백매의 꽃잎을 따 술잔에 띄웁니다.

순간 일행 모두는 꽃처럼 피어난 얼굴이요나누는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때 마침 달려 온 정수월 님의 해금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잠시 죽림(竹林속 피안(彼岸)의 세계에 젖었습니다.

 

이제 끝으로 제 작업실로 일행을 모셨습니다.

해묵은 매화첩과 벽면에 걸린 졸작을 선보이며

이종성 시인의 촉매(燭梅)’를 우포에서 온 송미령 시인이 낭송합니다.

이 시인은 수년 전 화실에 걸린 <정당월매>

불을 끄고 촛불 한 자루 속에서 완상하며 이 시를 즉흥으로 지었지요.

저는 이 시가 좋아 두루마리로 써서 화실 대들보에 걸어 놓고 있습니다. 

 

                   

    벼락을 치며

    성냥 한 개비에서 섬광이 번쩍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눈을 뜨고

    목숨의 불꽃을 얻는 한 자루 촛불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간 가늘고 질긴

    심지 밖에 없는 깜깜한 생입니다

    주검처럼 굳어진 목숨에 불이 오르면

    나는 가장 뜨거운 눈물이 괴며

    당신 앞에서 몰래 흐느껴 웁니다

    오래도록 참았던 내면의 암묵

    고요히 태우며 대금의 산조처럼 흩어지는

    슬픔 속에서 발화하는 꽃들

    가장 오래된 매화꽃이 핍니다

    나는 서쪽 당신은 동쪽

    우리가 그렇게 생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을지라도

    두 탑 사이에서 정당매가 핍니다

    마음 밖 세상은 모두 먼 곳이어서

    인적 끊어지고 만월만 남은 단속사지 하늘 아래

    이슬 같은 눈물 안으로 구를 때마다

    폐사지가 된 마음의 중심에서

    고사한 꿈의 둥치들이 목숨을 부양하며

    새로 돋는 가지에서 매화가 핍니다

    촛불에게는 천지사방 허공이 허방이어서

    잠깐 찰나의 허방을 짚어 불꽃 흔들리고

    그때마다 발등에 떨어진 촛농의 뜨거움이

    침몰하는 고요를 화들짝 깨워

    까뭇까뭇 흰 매화가 떨어집니다

    떨어진 어둠속에서 다시 백금의 흰 불꽃이

    화르르 일어나 천지가 다시 화염입니다

    한 차례 다비를 치른 듯

    다 태워 일체의 소리가 사라진 이 심야

    애끓는 별들의 전언

    소쩍새 울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흥건한 달빛뿐입니다

    이제 촛불을 끕니다

    꽃 닫힌 우주가 적---산입니다

 

                                   2012. 임진년 봄 <정당월매>를 완상하고 오늘화실에서 이종성 짓다.

 

 

실로 그러합니다.

꽃 닫힌 우주꽃피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적막강산이겠지요.

해서 산다는 것은 꽃소식을 듣는 일이라고 반문해봅니다.

새삼스레 매화첩을 넘기며 이 땅에 깃든 봄의 정령(精靈), 매화의 암향(暗香)’에 젖어 봅니다.

                               

                                                                                                                  2019.3.3

 

 

 


▶ 원정매

 

 

▶이씨고매

 

 

▶정당월매

 

 

▶산청 들매화 2.(2017)

 

 

▶산청 들매화 1.(2017)

 

 

▶남명매

 

 

▶단속사터의 들매화

 

 

▣ 화첩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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