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뷰

네번째 - 고추밭에서 본문

Culture /이호신의 그림편지

네번째 - 고추밭에서

노마드 뷰 2018. 9. 11. 23:04

 

이호신의 그림편지, 네번째 - 고추밭에서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가슬바람이 불어듭니다.

지난 여름은 유례없는 폭염으로 국내는 물론 지구촌이 열병을 알았지요.

이것이 인간에 의한 재앙임을 피할 수 없다고 연일 매스컴이 보도해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고요.

폭염으로 인한 국내 사망자가 50명에 이르고 온열 질환자수는 43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저희 텃밭에서도 실감하고 우려를 떨치지 못합니다.

지속적인 폭염으로 옥수수는 알이 제대로 영글지 못했지요.

담장의 모과나무는 잎이 모두 마른 채 열매를 맺지 않아 내년을 기약 할 수나 있을는지.

여름장마는 흉내만 내고 달아나 계곡 물소리 아쉬웠고,

기다리던 소낙비도 고작 찔끔거리다 꼬리를 감추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후 태풍 솔릭과 늦장마가 한반도를 가로 지르는 현상을 맞닥뜨려야했지요.

 

이렇게 폭염과 물 폭탄 사태로 인해

해마다 좋았던 고구마 농사도 시들하고 겨우 고개 든 식물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러구러 예전만큼의 수확은 애초에 기대를 접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고추만은 나날이 제 빛을 토하고 있습니다.

상황의 반전이율배반의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가봅니다.

빛이 있어 그늘이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와 같을까요.

 

지난 봄밭이랑을 기며 고추모종에 지지대를 세운 이후 하얀 별꽃이 반가워 화첩을 자주 열었지요.

그 별이 진 곳에 달린 풋고추는 입맛을 돋우었고요.

그후 땡초의 매운맛은 된장국을 감칠맛 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연일 붉은 고추를 골라 따느라 아내와 분주합니다.

나아가 가을 햇살에 부려놓아 잔디마당은 고추의 풍광으로 빛납니다.

결과적으로 폭염 덕에 고추가 잘 익어 붉은 빛의 향연입니다.

마당은 수확의 정취로 그윽하고쪽빛하늘에는 고추잠자리 떼 지어 맴돕니다.

 

그 마당에서 살펴보니 한 개의 고추가 아닌 집단이 보여주는 심미적공간이 우연 장엄하기도 합니다.

크고작고길고짧고굽은 것도 모두 고추이니 어느 것 하나 외면할 것이 없지요.

이 모두 초겨울 김장배추에 절여질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기에.

  

순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不計工拙 (불계공졸잘되고 못된 것을 가리지 않는다)’이 떠올랐습니다.

내용인즉 사물을 주관적으로 분별 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는 삶의 지혜와 달관의 경지를 이릅니다.

어쩌면 저마다의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요인도 이와 같겠지요.

서로 섞이되 비교할 수 없는 집합의 아름다움더불어 어울리는 공존의 미학!

이러고 보니 나의 적지 않은 편견과 넉넉지 못한 마음씀씀이 부끄러워집니다.

나이 값을 떠올리며 크던 적든 이웃과 여러 인연에 대한 성찰이 이어집니다.

해서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관용(寬容)’이란 단어가 떠오르니

몇 달 전 독서한 석복(惜福)』 (정민 지음)중의 내용이 떠오릅니다.

    

 

남의 참됨을 취하려면 융통성 없는 점은 봐준다.

질박함을 취할 때는 그 어리석음은 너그럽게 넘긴다.

강개함을 취하려면 속 좁은 것은 포용한다.

민첩함을 취하거든 소홀한 점은 넘어간다.

말 잘하는 것을 취하면 건방진 것은 눈감는다.

신의를 취했으면 구애되는 것은 못 본체한다.

단점을 통해 장점을 보아야지 장점을 꺼려 단점만 지적해서는 안된다.

 

                                      -진무경(陣無競)의 용물(容物)’에서

  

  

한편 고추밭을 서성이며 붓을 든 나날 속에 또 다른 깨달음도 도래했습니다.

결실과 함께 절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가을의 순리.

더 이상의 성장을 자초하지 않는 존재의 미덕을 함께 느낀 것이지요.

작은 텃밭에서 고추의 수확을 더 바랄 수는 없는 법.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뜻이 실감납니다.

 

해서 이만한 고추 수확에도 크게 감사하기로

이웃의 건조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태양초를 고집합니다.

매일 눈뜨면 고추와 함께 하는 나날이 이어집니다.

이 가을이 다 가고 초겨울 김장으로 쓰일 고추가 내일의 기다림이요희망임을 말하게 합니다.

어느덧 물드는 가을빛 노을 속에 고추를 거두며

김현승(金顯承,1913~1975)의 시 <가을날>을 두런두런 읊조려 봅니다.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 물이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버릴 때가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글, 그림  이 호 신

 

 


 

▶ '고추와 여인'

 

 

▶ '잘 되고 못된 것을 가리지 않는다' 

 

 

 ▶ '잘 되고 못된 것을 가리지 않는다' 

 

 

 ▶ '가을 빛 속에서' , 화첩 스케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