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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이호신의 그림편지

열 번째 - 설악산의 폭포바람

노마드 뷰 2019. 8. 5. 16:43

이호신 화백의 그림편지 10.  설악산의 폭포바람

▶ 비룡폭포

 

설악산에 둥지를 튼 시인의 집들이 겸 휴가로 두 가족 부부가 떠납니다.

운전을 못하는 내 사정에 모처럼 아내를 대신해 동행의 차와 남편이 운전대를 잡으니 참 좋습니다.

진주에서 출발하는 장거리여서 더욱 고맙고요.

무더위를 피해가니 내심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웅얼거리며 갑니다.

 

...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굽이 또 굽이 깊은 산중에 시원한 바람 나를 반기네

하늘을 보며 노래 부르세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

  

길 떠나기 며칠 전 시인에게 설악의 계곡과 폭포의 경관을 주문했었지요.

해서 설악산의 길목,

국립방태산자연휴양림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인근에서 마중 나온 시인 부부와 만났습니다.

그들의 안내로 휴양림의 계곡 마당바위에 이르자 폭포바람이 시원합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줄기 소리도 힘찹니다.

이어서 <이단폭포>를 만나니 모두들 소()앞으로 뛰어가 물보라에 휩싸였어요.

순간 아이들처럼 물장구치고 별난 포즈로 사진을 찍습니다.

 

  ▶ 마당바위폭포

 

▶ 이단폭포

 

일상에서의 일탈이 새로운 감흥과 희열을 자아냅니다. 

는 언덕위에 올라가 이 장면을 화첩에 담는데 지난 시절 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어요.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이 글귀를 청년 시절에는 붓글씨로 써서 벽에 붙여놓고 지냈어요.

내 삶이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물처럼 흐르기를 소망하며.

그 바람은 때로 여울로 흐르다가 폭포가 되어 떨어지곤 하였지요.

하얀 포말처럼 상념이 산산이 부서진 후 겨우 정신을 차리면 소()에 머물 듯 침잠해졌어요.

그리고 나서야 또 스스로 흘러야 할 길을 모색하며.

그런데 이와 같은 단상을 시로 만나 반가웠습니다.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끝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   저 폭포의 투신

 

         - 오세영의 <폭포> 중에서

   

 

의연하게 뛰어 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대책 없이 작가의 길로 살아 온 나와 닮았다고 여깁니다

해서 망설임 없이 뛰어 내린 세월이 계곡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계곡 상류에 이르자 마치 치마폭이 흘러내리듯 흩어져 쏟아지는 물줄기를 만났어요.

모두의 합의하에 <치마폭포>라고 이름 지으니 오늘 이 폭포는 새롭게 태어났어요.

휴양림의 숲길을 돌며 시인이 불러 준 이곳의 나무를 적어 봅니다.

박달나무, 신갈나무, 단풍나무, 다릅나무, 물푸레나무, 생강나무, 피나무, 소나무,

쪽동백나무, 거제수나무, 자작나무, 산벚나무, 산뽕나무, 까치 박달나무...

    

▶ 치마폭포 

 

계곡과 숲에 젖은 마음으로 휴양림을 나와 방동약수(기린면 방동리)를 찾으니

물맛이 독특합니다.

탄상성분이 함양된 사이다 맛이라고나 할까?

, 망간, 불소가 들어있어 위장병에 특효라고도 합니다.

이 약수로 내일 아침밥을 짓는다며 시인은 차에서 물통을 내립니다.

  

오늘의 숙소를 향해 인재읍의 하추리로 향하니 시인이 지은 청산재(聽山齋)’입니다.

이름 하여 산소리를 듣는 집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아늑하고도 시원합니다.

앞마당 아래의 소나무가 품에 들어와 터를 결정했고 집을 지었다니 그야말로 청산송(聽山松)이지요.

원경의 안산(案山)은 소잔등처럼 푸근하고 우측으로 비낀 풍광은 낙타봉처럼 너울거립니다.

또 산허리에 푸른 채소밭이 펼쳐져 자못 이국적이기도 합니다.

그 아래로 계곡이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전입니다.

건축은 노출콘크리트 공법에 2층 구조를 가진 소담한 양옥으로 시인의 여생이 펼쳐질 공간입니다.

그동안의 노고를 감축하며 잔을 나누고 돌아와 누운 이층 방,

밤새 들려오는 물소리를 베개 삼아 더위를 잊었지요.

눈을 뜨자 창밖의 소나무가 먼저 반기네요.

해서 가져온 빈 부채에 소나무와 계곡 이미지를 그리고 솔바람, 물소리 듣는 집이라고 써서 주인에게 건네었습니다.

굳이 의미를 두자면 집들이 선물로 여겨주길 바라면서.

 

▶ 솔바람, 물소리 듣는 집    

 

이제 안주인이 정성으로 차려 준 아침을 먹고 일행은 설악산국립공원의 설악동지구로 향합니다.

주차 후 입장권을 받는 거대한 산문(山門)의 현판(‘曹溪禪風始源道場雪嶽山門’)을 보니 반갑습니다.

평소 친분 있는 서예가 근원(近園)김양동(金洋東) 선생의 휘호입니다.

솔숲이 웅혼한 길에서 맑은 하늘에 치솟은 설악의 기상은 자연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이 느낌은 산악인이자 소설가인 박인식의 말에서 실감납니다.

  

설악은 산을 믿고 산에 기댄 선조들을 산악 민족으로 만든

삶과 역사를 통해 한민족 영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설악은 유일하다고 할 만큼 개성적이며 표현적이면서 파격이다.

판소리 가락처럼 물결치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한국산수에 예외를 두기로 작정한 조물주의 바로크적 야심작이다

 

                   -(<설악산> 임채욱 사진집에서)

 

 오늘도 숲을 지나 산을 오르니 이내 <육담폭포>가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국립공원에서 계단데크와 구름다리를 설치해 산의 경관과 폭포를 만끽하게 합니다.

이어서 <비룡폭포>에 이르자 사람들이 탁족(濯足)과 물놀이로 즐비합니다.

가져 온 간식을 나누는 사이, 나는 폭포의 전경을 담으려 건너편 언덕바위에서 화첩을 열었지요.

▶ 육담폭포 1. 

 

▶ 육담폭포 2. 

 

▶ 비룡폭포 

  

이름처럼 직립으로 쏟아지는 폭포는 시인 김수영의 표현한 시(‘폭포’)로 실감납니다.

의미의 실체가 살아납니다.

 

마치 이 폭포를 마주보고 쓴 시 같습니다.

폭포를 통한 인문정신이지요.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태와 안 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이제는 비룡폭포를 마주보는 가파른 산길을 오릅니다.

꿈에 그리던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를 만나러 가는 길이지요.

이 험로에 수고를 다한 계단데크 설치자의 땀을 생각하며 오릅니다.

예전 묵객들이 범접하기는 차마 어려운 지형으로 오늘의 행운에 고마운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 토왕성 폭포 1.

 

 

 ▶ 토왕성 폭포 2.

 

 등이 젖고 숨이 차서 몇 번을 다리쉼하며 오르다

소나무 새로 툭 트진 폭포를 보고 좁은 벼랑 터에 기어들어 화첩을 폈어요.

거대한 폭포풍광에 매료되어 붓을 들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절하는 마음으로.

이어 전망대에 오르니 관객들로 만원입니다.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니 절경의 가치가 더 빛납니다.

이 웅혼한 바위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경관에 답하여 절창을 부를 이 그 누가 있을까?

시인과 나는 작가로서의 숙제를 지녀야 했습니다.

3단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폭폭는 350m에 이르는 높이로 동양최대의 길이를 보유한다고 합니다.

마치 흰 비단이 바람결에 날리며 내려오는 이미지이지요.

외설악의 석가봉, 문수봉, 보현봉, 문필봉, 노적봉이 병풍처럼 두른 곳에서

폭포가 흘러내리니 음양의 조화로 여겨집니다.

이번엔 화첩을 세로로 펴서 폭포 중심으로 붓을 들었지요,

 대관(大觀)속의 소찰(小察)이 기운생동하기를 바라며 .

  

연이은 폭포순례로 흥분이 고조된 이튿날 아침,

마지막 코스로 정한 곳이 내설악의 <대승폭포>(大乘瀑布)입니다.

그런데 비가 뿌려 염려 속에서 장수대 지구로 갑니다.

공원 지원센터에 주차하고 우산을 들고 산길을 오릅니다.

장대한 소나무 입구부터 문화재청이 협력한 게시판엔 시인, 묵객들의 자취가 눈에 띕니다.

예전엔 이곳 한계령으로 인해 주로 한계폭포(寒溪瀑布)’로 불려 왔지요.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고사(枯死)했는지, 아니면 벼락을 맞았는가?

형해(形骸)만 남은 소나무를 바라 보다 붓을 들고 산길을 오르니

반가운 선현들의 이름과 시가 발길을 멈추게 하였지요.

한겨레의 후손으로서 그 이름을 불러 봅니다.

 

    

▶ 대승폭포 길목의 벼락송

 

 

▶ 대승폭포

  

구사맹, 김금원, 이유원, 이명한, 김창협, 김창흡, 홍세태, 이인상, 김시보, 조인영, 정범조, 안석경, 김시보

  

그중 개인적으로 반가운 분이 이인상(李麟祥,1710~1760) 으로 서화가(書畵家)로 이름 높은 분입니다.

존숭하는 님의 시를 일행과 멀어지며 몇 번이나 읊조렸지요.

그런데 묘하게도 그가 이곳에 온 날도 오늘처럼 비가 뿌렸나봅니다.

    

 

    신령스런 큰 산 천개의 봉우리가 옹위하여

    하늘의 강 하나의 기()로 나뉘었다.

    저장된 물은 해와 달 보다 깊고

    빚어놓은 듯 아지랑이 구름 사이로 솟아났다네.

    쏟아지는 햇빛 소나무에 가려지고

    날리는 포말 돌에 뿌려 향기롭다

    근원 찾아가자니 쉬이 정신이 두려워지는데

    음산한 빗방울 부슬부슬 흩뿌린다.

 

   

                         -이인상의 한계관폭(寒溪觀瀑)’ 중에서

    

 

수도 없는 계단데크를 오르려니 옛 사람들이 어떻게 벼랑의 산을 올랐을까 궁금해 옵니다.

정녕 목숨을 걸고 오직 폭포를 완상하기 위한 신념의 비장함에 전율마저 느낍니다.

마침내 폭포 전망대에 이르자 무슨 조화인지 비가 멎었어요.

이 알 수 없는 행운에 합장하며 화첩을 엽니다.

붓을 들기 전에 바라보는 대승폭포는 이번 여정의 압권이요,

대미를 장식해 주는 듯 모두의 함성과 감탄을 자아냅니다.

  

! 대승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한반도의 3대폭포로 불린다는

대승폭포의 기상을 형용하기란 어렵습니다.

화첩에 폭포바람이 불어드니 태초에 뛰어내린 물길의 환영(幻影)이 일어납니다.

그 시원(始原)의 역사가 천 길 낭떠러지로 오늘에 이어 내일도 굽이치겠지요.

어김없는 이 대자연의 진리 앞에서 우리는 진정 나그네임을 자인합니다.

오늘 이 세 쌍의 나그네 부부는 이종성 시인과 사진을 찍는 전윤호 선생(교사),

그리고 우리 부부입니다.

모처럼 시().().()의 가족이 만났으니 흔치 않은 일입니다.

이 귀한 폭포여정의 시절인연은 계곡을 타고 강물에 이를 것으로 믿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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