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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이호신의 그림편지

열두 번째 - 유네스코 세계유산-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서

노마드 뷰 2019. 12. 12. 09:17

이호신 화백의 그림편지 12.

유네스코 세계유산-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서

    

 2019 7,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한 제 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대한민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는 관련자의 노력뿐만 아니라 국민적 여망과 성원이 함께한 결과입니다.

그동안 노력해 주신 대한민국 정부와 지자체, 서원 유림, 전문가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직도 현장에서 만세를 외치며 여러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던 감개무량한 순간이 아른거립니다.

...

                              2019 920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이사장 이배용

    

 

영주의 소수서원 입구 대형주차장에서 열린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등재 기념행사는 장엄하였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9개의 서원

(소수서원,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도동서원,필암서원,병산서원,무성서원,돈암서원)의 관계자는 물론이거니와

주최 측(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을 비롯한 지자체 인사들의 축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등재에 공헌한 이들에 대한 시상이 이어졌습니다.

 

 

소수서원 서승원(徐氶源) 도감(都監)

 

 저는 사흘 전에 와 소수서원 인근에서 숙박하고 서원을 답사하였어요.

소백산 아래 둥지를 튼 서원의 입지 경관과 건물구조를 화첩에 사생 한 후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문득 돌아보니 스무 해도 넘은 영주의 문화유산순례가 오늘의 만남을 위해 성숙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동안 영주의 마을과 부석사(浮石寺), 그리고 소수서원 소나무가 화첩에 담겼고 발표로도 이어졌어요.

그 중 부석사 전도’(1999년 작)는 부석사 박물관에 소장되었지요.

한편 소수서원은 일찍이 솔바람모임(소나무를 사랑하는 모임) 인연으로 뜻 깊은 추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날의 사연을 <숲과 문화-‘화첩속의 소나무’ 2019 3,4월호>에 발표했어요.

솔숲이 울울한 소수서원 입구에 모여 한 바탕 풍류를 즐긴 우리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소수서원 소혼대에서> (솔바람 모임, 2003년) 

...

이미 솔바람에 심신이 씻긴 발길은 소수서원에 이르렀다.

예전처럼 학예사 박석홍 선생이 일행을 맞아주며 특유의 달변으로 서원의 역사와 의미를 설파한다.

현재 세계문화유산 서원 등재 후보로 올라있는 소수서원은 나와 각별한 인연이다.

소수서원 전경을 그리기위해 여러 당우들의 배치와 전체를 조감해 보던 시절(2003)이 있었다.

그 서원의 둥지는 솔숲으로 울이 조성되어 화면구성으로도 흥미가 컸다.

또 이듬해(2004)는 솔바람 나들이가 서원입구의 솔숲에서 있었다.

박희진 시인께서 이름 지으신 소위 탈혼대(脫魂臺)에 모여

(이애주)과 가야금(이동희). 현장 휘호(김양동, 조수현). 그리고 그림(이영복,이호신)을 그렸다.

나는 이 뜻 깊은 행사를 긴 두루마리 (60x312cm)로 제작했다.

(박희진)와 글씨(김양동), 그리고 그림이 함께한 시()()()의 만남은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우리시대의 풍류로 인식한 까닭이다.

 300년 전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野宴圖)>를 새삼 떠올리며...

나아가 오늘의 각별한 만남과 시절인연을 기리는 일 또한 전통의 면면한 아름다운 일이라 여겼다.

그 작품의 명제는 솔바람 누리였고, (박희진)은 이렇게 시작 된다.

 

소수서원 솔밭 탈혼대에서

 

 

소수서원 입구 왼쪽에는 꽤 넓은 둔덕이 있는데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자리라 한다.

일컫기를 소혼대(消魂帶). 고사(故事)야 어찌됐던 도무지 이곳 풍광(風光)에 걸맞지 않는 이름인 것이다.

하여 이제부턴 탈혼대(脫魂臺)라 부르련다.

 

     탈혼대에 올라서면

     누구나 이내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을 되찾게 된다.

​     나무 중의 영물(靈物)인 소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서서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    ...(후략

 

 

 

 ▶<솔바람누리>, 소수서원 탈혼대에서(2004년)

 

이렇듯 소수서원 길목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서원 들머리를 장엄합니다.

일명 공작송(孔雀松)’으로 부르며, 언덕 바위의 소혼대 주변 소나무는 기상이 더욱 훤칠합니다.

해서 학자수(學者樹 )로 총칭합니다.

세한삼우(歲寒三友)나 세한도(歲寒圖)에서 보이는 강인한 선비정신을 기린 의미부여라고 여깁니다.

 

 

▶소수서원과 소나무

 

▶<소수서원과 학자수>, 92×60cm(2019년)

 

▶<소수서원 취한대>, 92×63cm(2019년)

 

이에 다시 찾은 소수서원은 세계유산이란 명예를 지녔기에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고 붓을 든 손길은 바지런해야 했습니다.

이 기회에 그동안의 여정을 매듭짓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사흘간 현장에서 화첩을 펼쳤습니다.

이와 더불어 관계서적을 통해 인문정신을 체득해야 했지요.

 

한국 서원이 갖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정신적인 무형적 측면과 물질적인 유형적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고 가치관의 혼란으로 인한 정신적인 빈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오늘날 심성의 수양과 성찰의 전인교육 방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재현되는 서원제향의식(書院祭享儀式).

나아가 서원의 입지(立地)와 배치공간의 수월성 및 건물건축의 우수성을 제기한다.

                               -한국의 서원유산1(한국서원연합회)23~24쪽 중에서

  

서원이 지닌 핵심사항을 염두에 두고 나는 무엇보다

이 시대의 작가로서 문화유산제작의 타당성을 새삼 점검해 봅니다.

과거는 물론 오늘과 미래로 흘러갈 가치와 보전에 대해서.

그리하여 박재된 유산이 아닌 생활유산이 될 때 생활산수를 그릴 수 있노라고.

지극히 마땅한 일이로되 지난 향수에 젖지 않고

오늘의 삶이 적극 개입하는 화폭으로서 시대정신을 떠올리며...

이런 통찰이어야 창작의 의미가 살아나고 주인의식으로 그려야 작품이 되며

나아가 세계유산에 기여하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스스로 이르기를 문화유산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못할 바에야 붓을 삼가는 것이 도리며,

작품이라는 미명아래 누를 끼치지는 말아야한다는 나름의 결의마저 새삼스럽습니다.

 

 

▶<소수서원 전경>, 64×92cm(2003년) 

  

이러구러 오랜 세월의 밥값을 떠올리며 서원 주변을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변화를 실감합니다.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그 위상이 커서인지 새로운 풍광이 드러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소백산에서 흘러 온 죽계천(竹溪川) 너머로

수많은 전통가옥과 신축건물 건립에 따른 오늘의 현실입니다.

산자락아래의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선비촌. 그리고 우측 연화산 자락 발목에 소수박물관이 신축되었고,

그 너머로 영주시청소년수련관이 얼굴을 내밉니다.

이른바 영주시에서 추진해 온 소수서원 선비여행의 프로젝트의 풍경입니다.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은 한국 인성교육의 도량으로

선비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를 재현, 숙박시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소수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유교 종합박물관으로 건립했는데

최근에 문을 연 기획전시실은 특별히 눈길을 끌었어요.

안향 초상(安珦 肖像,국보 제111), 주세붕 초상(周世鵬 肖像,보물 제 717)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강론을 듣는

기록화(‘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제485)를 배관하는 것만으로 무척 뜻 깊고 반가웠습니다.

 

이렇듯 둥지가 넓어진 서원의 주변 상황이지만

시대를 거슬러 소수서원 건립의 배경과 의미를 알아야 서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이에 문헌의 요약이 필요합니다.

    

서원은 원래 중국에서 발생한 사립학교 제도이다.

대개 8~9세기부터 그 기원을 찾지만,

본격적인 출발은 12세기의 주희(朱熹,1130~1200)가 중건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부터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면서

주세붕(1495~1554)은 주희의 백록동서원 중건을 그대로 벤치마킹 하였다.

제도와 운영방침은 물론 서원의 이름까지 비슷한 백운동으로 하였다.

단순한 주희 숭배열, 또는 모방에서였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뒤를 이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에 의해

우리나라의 서원제도가 확립되고 이후 크게 발전하여,

조선시대 중기의 수준 높은 유교문화를 창출했던 사실에서 구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유산1 39

 

이렇듯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은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세웠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처음 국내에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安珦1243~1306)을 흠모하여

그 자취를 위해 향교의 중건과 영주 출신인 안향을 봉향하는 사묘건립을 꾀하였지요.

이에 대한 명분으로 주세붕의 변호가 전합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나음에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는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가르침이 없다면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여서 ...

삼강(三綱)이 무너져 인류가 멸망한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무릇 가르침은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묘를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배움을 도탑게 하는 법이니

진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굶주림을 구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다.

! 주자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죽계(영주의 계천)는 바로 문성공(안향)의 고향이다.

가르침을 베풀려면 반드시 문성공을 높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위의 책 51~52

    

이에 대한 실현으로 백운동서원이 창건(1542,중종37)되었고,

8년 후(1550,명종5) 국가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니

퇴계 이황이 이곳 풍기군수로 재임한 시기입니다.

그 흔적으로 임금의 친필 현판이 있습니다.

또 죽계천 너머 취한대(翠寒臺) 옆 바위에 새겨진 석각(石刻)으로 붉은색의 ()’은 주세붕이 썼고,

흰색의 白雲洞 (백운동)’은 이황의 글씨라고 전합니다.

 

▶소수서원 전도 이미지 구성 

    

이제 인문의 학습이 있었으니 본격적인 사생으로 이미 둘러본 현장을 하나씩 화첩에 담는 일이지요.

이에 대관(大觀)적 풍수지리의 이해와 소찰(小察)의 붓길을 절감합니다.

먼저 산파도처럼 펼쳐진 소백산 아래로 송림지에서 죽계천이 달려오고

좌측 언덕(영귀봉) 솔숲 아래로 소수서원 전경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죽계천 너머의 연화산 아래로 여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지합니다.

화첩 첫 장에 이 형상을 부감(俯瞰)으로 구현해 보고,

서원 입구 솔밭으로 내려가 다시 서원을 향해 거슬러 오르며 붓을 듭니다.

무성한 솔밭 가에 자리 잡은 당간지주(幢竿支柱)

예전 이곳이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였음을 살피게 합니다.

그 반대편 언덕(소한대)의 소나무(학자수)아래로

거대한 은행나무가 빛을 발하니 서원의 내력을 지켜 본 영물입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 

  

그 앞마당에 경렴정(景溓亭)이 있고 그 뒤에도 큰 은행나무가 있으니

예로부터 서원과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과 역사를 알게 합니다.

경염정에서 바라보는 죽계천의 경관에 이끌려 돌다리를 건너면

취한대의 풍류가 길손을 머물게 하지요.

그리고 먼저 경염정에서 바라본 바위의 두 석각 (‘’ ‘白雲洞’)이 선명합니다.

  

 ▶죽계천과 취한대

 

다시 다리를 건너 돌아오면 서원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이 열리고,

명륜당(明倫堂) 팔작지붕의 위엄이 중후하게 느껴집니다.

유생들의 강론과 강학공간입니다.

이 축으로 언덕아래 자리한 문성공묘(文成公廟)는 안향을 중심으로

안축(安軸), 안보(安輔), 주세붕을 배향한 곳이지요.

이곳의 핵심 인물임에 길손은 고개 숙여 합장하고 선현들의 영혼을 기립니다.

 

 ▶경렴정, 지도문, 명륜당(강학당), 문성공묘 

 

뒤뜰로 이어지는 직방재(直方齋), 일신재(日新齋),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유생들의 교실과 숙박, 그리고 휴식공간으로 이용되었다지요.

이 건축 옆과 뒤로는 책을 보관한 장서각(藏書閣), 제기를 보관한 전사청(典祀廳)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화첩을 펴고 있는데 한 외국인 부부가 다가왔어요.

그들은 전사청을 손짓하며 맞배지붕 아래의 벽면 구조는

몬드리안의 비례보다 한수 위라고 엄지척을 보이며 화첩그림을 찍어갑니다.

천연의 아름다움을 생활화한 선인들의 안목이 빛을 발하는 경우입니다.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 장서각, 전사청, 영정각

 

 이어서 이곳 선현들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影幀閣)의 협문을 나서면

사료관(史料館), 그 옆 담장 너머로 고직사(庫直舍)가 있습니다.

예전 서원을 관리하던 곳으로 현재도 살림이 보이고 키 큰 살구나무와 감나무들이 정겹습니다.

이제 마지막 문턱을 넘어 마당 끝에 이르니

서원 중수비, 숙수사 유물이 관리사무실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사무실은 충효교육관이란 현판을 걸었어요.

 

 

 ▶사료관, 고직사, 관리사무실(충효교육관) 

 

 여기서 후문으로 나서면 단풍이 아름다운 거대한 활엽수 군락과 연못(탁청지)을 만납니다.

잠시 벤치에 앉거나 연못 주변의 솔숲을 거닐다 죽계천의 백운교(白雲橋)를 건너면

소수박물관으로 이어지는데 어서 오시라고 광풍정((光風亭)이 길목에서 반깁니다.

  

▶소수박물관, 선비촌,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이제 이 길로 이어지는 선비촌과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의 건축은

21세기의 유림문화 부흥과 여행 관광지로서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굳이 작가가 이 문화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화폭에 넣으려는 의도는 현실의 반영입니다.

세상에서 변하지말야야 할 것과 변화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강물이 흐르듯이 역사의 평가는 미래의 오늘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소수서원은 자체적인 활동과 관광객의 인프라를 위한 제반시설이 필요로 하고

여전히 모색의 과정에 있음을 실감합니다.

한국최초의 서원이라는 타이틀이 유효하고 타 서원에 시범을 보여줌은 시대의 요청이겠지요.

그러나 한편 신중히 통찰하여 서원의 본질을 계승하라는 주문은 결코 무리가 아니겠지요.

마침내 저는 오늘의 소수서원을 그리며 증언자로서 붓을 들었습니다.

문화유산은 박제된 형식이나 형상에서 벗어나야 진정성을 지닌다고 여기면서.

자랑스런 세계유산이되 우리가 먼저 아끼고 사랑해야할 주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소통과 화합’ ‘나눔과 배려의 마음이 꽃피는

서원유산, 정신문화의 샘터가 되어주기를!

 

                                        2019 12

▶화첩과 소수서원 전도 밑그림

 

▶소수서원 밑그림(부분)

 

▶소수서원 전경(부분)

 

<소수서원 전도>, 180×272cm(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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