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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달산에 남긴 일제의 흔적 . 이난영의 친 오빠인 이봉룡이 쓴 이 곡은 전편인 에 나왔던 지명과 정서가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리고 ‘목포는 항구’라는 내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목포는 항구다. 항구며, 안개 속에서 기적이 우는 곳,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이별의 슬픔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목포는 항구다’에는 항구가 뜻하는 한과 꺾이지 않는 저항의식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은 정신이 노래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유달산의 유선각은 이 발표되기 3년 전에 세워졌다. 개항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1935년, 목포는 이난영을 통해 삼백년 원한을 왜 다시 되새김질 하고 있었던 것일까? 유달산에 그 답이 되는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오포유달산에 있는 오포. 정오에 포..
목포의 눈물 - ‘삼백년 원한 품은‘이 ‘삼백연 원한 풍은’이 된 사연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육전거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목화공장에서 일하던 그녀는 열여섯 살에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막간 가수로 처음 무대에 섰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손목인이 작곡하고, 문일석이 가사를 쓴 이 1935년에 발표된다. 목포의 애국가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90년대 까지 호남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가 승리를 거둘 때마다 팬들이 목 놓아 합창한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단지 응원가만이 아니었다. 한(恨)과 설움으로 살아온 이 땅의 사람..
.1근대도시, 목포의 시작 땅끝까지 달려온 기차. 1914년 1월 11일 개통되어 100년이 넘게 호남의 젖줄이 되어온 호남선. 그 마지막 역이 이곳 목포다. 70년대엔 목포역에 기차가 도착하면 플랫폼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많았던 도시, 목포. 그러나 도시의 눈물은 벽장 속 깊은 곳에 간직한 낡은 흑백사진처럼 흐려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져 갔다.[목포역 플랫폼 사진]목포는 무엇이든 흘러와 고이는 곳이다. 종착역이란 그런 곳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된 뒤, 30년 동안 호남의 비옥한 땅에서 실려 온 쌀이 바로 이곳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떠났다. 그 수탈의 고통에 이르면 ‘목포의 눈물’은 더욱 진해진다. 하지만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목포만..
'국경의 밤'을 쓴 파인 김동환은 1929년 6월, 「삼천리」창간호에 진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인가만 빼 놓으면 전 시내가 고적 속에 파묻혔고 또 떠들썩한 기녀의 노래와 가야금만 덮으면 거리거리가 무덤 속같이 고요해지는, 고전적이며 비유동적인 도회이다. 그래도 이 속에 조선의 목숨을 한 백년이나 늘려 놓았다 하는 정열적인 여성인 논개 누나의 영혼이 길이 잠들어 있거니 생각하면 영원히 생명이 약동하는 살아 있는 도성으로 보여 무한히 친근하고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 .....중략...... 아무튼 논개를 아는 것은 진주를 아는 것이요, 진주를 아는 것은 근세 조선사를 아는 것이니 이 땅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많은 박력을 가지고 찾아들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같은 고도(古都)이면서 서울에서 살다가, ..
겨울 숲은 고요하다. 지난 여름 계곡을 무섭게 훑어내리던 물줄기도 얌전하게 땅 밑으로 숨어 버렸다. 숲으로 오후의 햇살이 낮게 기어든다. 인적이 끊긴 숲에는 햇살 한 줌과 바람 한 올이 놀고 있다. 또 다시 겨울이다. 우리의 바쁜 시간 속에서 가을은 차창 밖에서만 스쳐 지나갔다. 짐 꾸리기와 더불어 마음에 결을 세우는 무장을 하고 상경하는 길에 저만치 덕유산 기슭의 붉은 기운을 보았을까? 서울 일 한 자락 끝내고 돌아오는 길, 가을이면 붉은 치마를 두른다 해서 적상산, 졸음 가득한 눈에 다시 꿈을 꾸듯 그 붉은 기운이 스쳤을 것이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오르내리는 동안 계절은 바뀌었다. 갈계숲과 수승대 사이 솔숲 지난 여름 폭우 때 무섭게 흘러가던 덕유산의 물줄기는 이제 한 없이 가늘어졌다. 가늘어졌으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