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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이호신의 그림편지

열세 번째 - 산청 율수원의 정월 대보름

노마드 뷰 2020. 2. 19. 21:57

2020년 경자년(庚子年)이 밝았으나 세상은 우울합니다.

중국 후베이성(湖北省)우한(武漢)에서 발생한 폐렴(코로나 바이러스)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해서이지요.

모두 외출과 모임을 삼가고 마스크를 쓰고 사는 모습이 오늘의 풍속도 같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월대보름, 달을 따라 산청율수원 (山淸聿修園)에 모인 이들은 특별합니다.

 

사연인즉 진주의 정헌식 선생(한국차문화역사관장)의 초대가 있어서이지요.

정선생의 부인이신 정정자 선생님 교직 정년퇴임을 감축하는 자리에 열 명이 모였습니다.

그동안의 노고를 기리어 아름다운 한옥에 묵으며 대보름 달빛 속에 소리 한마당을 펼치자는 것이지요.

이에 동편제 김소현 명창은 구례에서, 원로 전각가인 이정환 선생은 대구에서 오셨습니다.

진주에서는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와 부인 박원숙 님, 대금연주가 이연복 선생과 부군인 송재용 님,

그리고 산청의 우리 부부가 함께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모임을 산청율수원으로 택했을까요?

실은 저에게도 깊은 인연이 닿았고 그림도 그렸기에 소개합니다.

 

산청군 신등면에 자리한 산청율수원은 황매산과 신등천을 배경으로 자리한 한옥입니다.

명문집안인 순천박씨 고헌(古軒)고택을 2013년 재능교육(박성훈 회장)에서 신축하였지요.

집 이름은 <시경>문왕편에 나오는 율수궐덕’(聿修厥德)이라는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율수(聿修)’는 조상의 덕을 받들어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박성훈 회장은 조상이 살아온 터전을 확장, 매입하여 신축한 한옥으로

안 사랑채에 농암(農菴)’, 바깥사랑채에 고헌(古軒)’ 이란 현판을 걸었으니

할아버지와 선친의 당호입니다.

그 밖에 한옥 현판과 주련도 모두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를 받고 새겨서 걸었지요.

후원에는 연못을 파고 정자로 용담정(龍潭亭)을 지었으며 사철 피어나는 꽃나무와 수목도 이채롭습니다.

하여 완공한 2013년에 한국관광공사에서 우수 한옥스테이로 인증 받았고,

국토교통부 주최 대한민국 한옥공모전 건축부분 올해의 한옥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과거의 한옥도 귀하지만 법고창신(法古創新), 21세기 한옥의 전범으로 태어난

산청율수원의 뜻과 구조를 살펴보고 감동한바 화첩을 열었지요.

지난해 봄(2019,3) 이곳을 찾아 당우 하나하나를 사생하고 돌아와 한옥의 전경을 작품으로 제작했어요,

이후 완성된 산청율수원그림은 재능교육의 Jcc아트센터(서울 종로구 혜화동 소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곳 용담정에서 주인과 함께한 애국율수회 모임도도 그렸습니다.

4인 가족 부부모임으로 원본은 주인이 소장하고, 다른 가족들은 영인(影印)한 그림으로 추억을 나누었습니다.

▶산청율수원 전경, 136×179cm, 한지에 수묵채색(2019년) 

 

 

▶애국율수회 모임도, 69×91cm, 한지에 수묵채색(2019년)

  

이처럼 뜻깊은 곳에 정월대보름 전야에 모였으니 의미는 남다릅니다.

모두 꽃샘추위도 아랑곳없이 마당에서 만월을 바라보며 서성입니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 저녁만찬이 시작되었어요.

이곳 김창배 관리소장 부인이 손수 장만한 식단은 그야말로 자연식입니다.

지리산 야생산나물(장록나물. 금낭애나물, 들미나물, 다래나물, 삿갓나물, 개발치나물, 지부나물, 미역초나물, 수리초나물 등)

별미로 모두 행복한 저녁입니다.

식사 후 정선생 부부를 위한 샴페인과 축하 케익을 자르고 모두 지하 공간으로 내려갑니다.

이처럼 멋과 맛이 뛰어난 율수원은 지하에 문화공간을 마련해 더욱 효용의 가치가 빛납니다.

시대의 철학을 담은 건축이라 하겠습니다.

 

마침내 오늘의 주인공인 정정자 선생님 퇴임축하 마당이 펼쳐집니다.

일행들이 준비한 꽃바구니와 선물이 오고 갑니다.

저는 작은 종이에 붉은 매화를 그리고 언제나 새날이라고 쓴 그림 액자를 선물했습니다.

삶은 정년이 없으니 늘 새날에 사시기를 발원하는 마음으로.

 

작은 의식으로 차를 끓이고 모두들 둘러앉자 남편인 대숲 정헌식 선생이 부인께 편지를 전합니다.

순간 모두 숙연해지고 내용이 궁금해졌지요.

이 뜻깊은 사연을 이연복 님의 대금연주 속에서 주인공이 낭송합니다.

내용인즉 편지의 주인은 물론 이곳에 함께 한 아내들을 위한 헌사 입니다.

    

     우리들 아내 이야기

 

    오늘 밤을 넘기면 정월 대보름입니다.

​    오늘 율수원 이곳에 자리를 함께 같이한 형제 동지 모두

    어진 부인들의 내조에 힘입은 분들입니다.

    백랑형님은 후포 형수님의 응원을 받았고,

​    동편제는 명창 부인의 응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    현석 아우님은 꽃자리 부인의 응원을 받았고

    선강 아우님은 부인 박선생님의 응원을 받았으며,

​    백송 아우님은 세실 부인의 응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    그리고 대숲 본인은 부인 아함의 응원을 받았습니다.

    모두 일상적이지 않은 다소 험난한 길을 끝까지 한길로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내조로 도왔습니다.

​    오늘 모임은 아내 분들의 내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은 대숲 제 아내 정정자 아함이 어룸한 저 떠받치기 40,

​    애들 키우기 7, 교육활동 31년을 마치고 하산한 날이기도 합니다.

​    사실 제 아내는 제가 쓴 편지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    이런 때 형수님, 제수씨 어진 부인들의 삶의 수고를 생각해 보며

    내조의 고마움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여하간 별 감정들이 오고가지만 우리 모두는 한숨을 미소로 변신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    사귀며 처음에는 그랬죠,

    ​우리들 지친 몸, 쑥스럽게 손잡으며 속삭였습니다.

    일종에 뻥인줄 알면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억지로 알 수 없는 허공 휘젓기였죠.

​    그렇더라도 곤륜산 신령님께, 수미산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    어떻든 가슴에 품어 갈테니 꿈그릇일랑 깨트리지 않도록 빌었습니다.

    아스팔트 거리에 깔린 가슴이 쏟은 핏자국 끈을 꼬아

    꿈그릇을 싸서 천만리 나는 대붕의 입에 물렸습니다.

​    그게 아니라면 우리들 미소의 눈빛은 금방 눈물덩어리로 변했을 것입니다.

    ​찬바람도 그저 부는 바람으로 여기면서. 몇 번이고 가슴을 졸였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마음에 평화가 드리울까?

    아직도 님의 발자국 소리를 헤는 밤.

    별을 보며 그저 웃지요, 텅 빈 충만!

    이제는 마을을 휘감아 도는 강물소리가 들리고 구름에 가려진 먼 산도 보입니다.

    ​또 그런 우주의 꽃, 우리들도 다시 새롭게 보입니다.

    이즈음 집집마다 힘찬 변혁을 꿈꾼다고 들었습니다.

​    백랑형님 따님의 혼담 소식, 현석아우님의 북한산 전 이후 유네스코 서원 그림전 준비,

​    선강아우님의 혁신도시 서점 오픈 준비, 겸손한 백송아우님의 도약,

​    금방 하산한 대숲 부인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    따뜻하고 굳센 마음으로 새 힘내어 힘껏 살아보겠다는 멋진 부부께

    서로 다함께 박수를 보냅시다.

    세실의 대금소리는 그런 오르내리는 감정을 만파식적 다름없이 잠재워 줄 것입니다.

​    동편제 김소현님 소리 한 판에 우리 꿈을 실은 천둥소리는

    백두대간이 끊어질까 지리산이 놀랄 것입니다.

    여전히 안개 같은 그림을 그리며 서로간의 자존을 지켜준 분들,

​    손잡고 그저 좀 더 길게 웃어봅시다!

​    경자년 모두 만복 가득하시길 빕니다.

 

        2020 2 7일 율수원에서

                                 

       동지부부 만남과 아함 하산을 기념하며

       대숲 정 헌 식 올림

    

 이와 같이 아내의 정년퇴임을 위한 편지를 본적이 있었던가요.

더불어 함께 살아 온 아내들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연이 심금을 울립니다.

한편 숙연한 분위기에도 박수가 그치질 않으니 공감하고 나누는 마음입니다.

 

어쨌든 축하연이니 어느덧 곡차()도 돌아가고 동편제 명창의 북소리와 즉흥 사설이 허공을 찢습니다.

여기에 대금연주가 받아주니 마치 부창부수(夫唱婦隨)의 가락인양 절묘합니다.

흥이 무르익자 흰 도포를 입은 백랑 선생의 어깨춤이 넘실되고

대숲선생의 막춤(?) 드라마가 펼쳐져 모두 박장대소합니다.

명창의 사설은 오늘 지리산 하늘아래 모인 이들의 사연입니다.

넉살과 풍자로 풀어내니 한 철 풍류의 시절이지요.

 

 

 ▶동편소리(김소현)와 대금연주(이연복)

 

 

▶이정환 선생과 정헌식 선생의 춤

 

 

▶백랑 이정환 선생

 

 

▶율수원 모임도(밑그림)

 

 

​▶율수원 모임도(채색) 

어느덧 이윽히 밤은 깊어가고 보름달이 중천에 머물며 온 누리를 비춥니다.

세상의 어둠을 품어주고 또 새날을 선물합니다.

하여 이 아름다운 시절인연, 어제의 오늘을 추억하기에 붓을 들었지요.

함께한 그날의 감회를 기리고 그려봅니다.

 

 

연서(戀書)를 읽는 시간 만파식적(萬波息笛) 허공을 물들이고

동편(東便)소리는 칼바람 무찔러 섬진강이 풀리네

흥에 겨운 춤사위 지리산 능선으로 출렁일 때

이산 저산 꽃이 피고 누리에 둥근 달 솟아 오르네

   

이천이십년 이월 팔일 경자년 대보름밤

산청 율수원에서 검돌 그림

 

 

 

▶산청율수원의 대보름(밑그림)

 

 

▶산청율수원의 대보름 , 69×45cm, 한지에 수묵채색(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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