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뷰
열네 번째 - 매화나무 아래에서 본문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리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중)
이 시를 다시 음미하며 화실 뒤 툇마루 주련(柱聯)에
스스로 쓴 ‘다 지나가고 늘 새로 온다’는 글을 매일 보는 나날입니다.
또한 “하지만 슬픔이 너무 길다. 고통이 너무 깊다.
오작교 없이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문병란의 ‘직녀에게’ 중)”는
시와 노랫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 화실 뜰의 홍매(화첩)
세상이 온통 코로나 바이러스로 신음하니
확진자와 그 가족은 물론 뉴스를 접하는 국민은 우울합니다.
이미 사정은 전 세계로 번져 지구촌의 재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이런 판국이니 청정지역 지리산 자락에 사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기에는 난감합니다.
해마다 3월이면 산청3매 탐매객들이 저를 불러내었지만 이번엔 기약이 없네요.
실은 서울팀이 몇 차례 연기했다가 결국엔 취소 했구요.
사정이 이러니 겨우내 숨죽이다 꽃망울을 터뜨린 뜰의 매화가 쓸쓸해 보입니다.
어느 해 보다 보름이상 성급하게 피어났었는데...
해서 아내와 길을 나섰습니다.
산청3매(원정매, 정당매, 남명매)와 남사5매(이,박,정,최,하씨 고매)의 안부를 위해.
귀촌 10년 동안 해마다 화첩에 담아왔던 매화나무였으니
그립기로 마치 매화나무가 나를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원정매(화첩)
그 현장에서 마주한 매화들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해 보다 꽃이 좋고 쪽빛하늘에 찬연합니다.
그 중 고사(枯死) 할 줄 알았던 단속사지터의 야매(野梅)는 생기를 더해 반가웠지요.
▶단속사지 야생매(화첩)
한편 남사마을 유림독립기념관에 식재한 고매(古梅)의 자태가
위용을 드러내며 꽃을 피워 화첩을 펴게 합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선비 애국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선생의 영혼을 기려
남사6매로 더해 ‘곽씨매’ 혹은 ‘면우매’로 이름 지어 봅니다.
▶면우매(화첩)
▶면우매(화첩)
며칠간 매화사생을 마치고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 남명매와 천왕봉을 그렸어요.
그리고 남명 선생이 산천재(山天齋) 에 주석한 후 쓴 한시를 한글로 풀어 화제로 썼어요.
봄 산 어느 곳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만
다만 천왕봉이 하늘 가까움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들어와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은하수 십리 물길 마시고도 남음이 있으리
▶천왕봉과 남명매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졸작을 보내자 답신이 옵니다.
의례 그림에 대한 인사는 상찬이고,
시국에 따른 의미부여는 ‘뜻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 중 이번 코로나 사태로 문을 닫은 남명기념관의 변명섭 문화해설사,
최문옥 지리산자연유산해설사와 주고받은 문자입니다.
“코로나로 남명매를 접하지 못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환란에 가슴 태우는 이나라 백성들에게
현석 선생의 그림과 글은 큰 힘 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았으면 합니다” (변)
“작가의 제작의도를 간파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세태에 천왕봉의 기상과 남명매의 향기가
누리에 함께하길 발원하는 붓길이지요”(이)
“선생의 바람이 온 누리에 널리 퍼져 매화의 기절(氣節)처럼
환란을 극복하리라 굳게 믿습니다”(변)
“현재 매화나무 보다 더 웅장하고 물결 색감은
은하수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색감입니다.
남명 선생님이 보신 은하수 십리물길이 이렇게 보이지 않았을까요?”(최)
“ 최선생의 해석이 작가를 기쁘게 합니다.
환란의 세상이 이 기상과 기운으로 조금이라도 정화되기를 발원하며!” (이)
한편 새 해 들어 처음 소식을 나눈 하동의 박남준 시인의 답신은 각별했습니다.
“ 아궁이에 가지치기로 자른 매화나무로 불 지피며
꽃을 피우던 나무의 시간을 생각했네.
불을 때고 나오니 달이 떠있네.
봄 밤 매화꽃잎 흩날리는데
달빛흐르는 꽃향기 아래
술잔 기울일 이 없는 그를 슬허하네”
나는 그날 밤 잔을 비우며 시인에게 답했지요.
“꽃과 불꽃, 보름달과 남준 형이 술잔에 어리어...”
이 그리움이 산을 넘어 오게 했는지,
이튿날 선약도 없이 하동 악양에 사는 이상윤씨 (숲길 상임이사)와 박시인이 화실로 찾아왔어요.
시절이 수상하여 외부인 사양인 때이니 쳐들어 온 셈이지요.
까닭인즉 탐매와 매화음(梅花飮)을 은근히 기대하며.
지리산이 맺어준 지인들이고 새해 첫 만남이라 반가웠어요.
마침 이상윤씨로 부터 연락이 닿은 통영 문화원의 송언수 사무국장도
탐매기행 차 합류해 화실 뜰의 매화나무아래 모였어요.
▶매화나무 아래에서(화첩)
▶매화나무 아래에서
우연 꽃자리가 되고,
아내가 준비한 상과 술잔에 꽃잎을 띄우니 뜻밖에 매화음이 열립니다.
최근에 내가 그린 매화첩도 완상하고 흥이 무르익자 박시인의 남도창과 시 낭송이 이어집니다.
‘슬픔’ ‘내 마음속의 당신’ 그리고 ‘단속사지 정당매’ 등으로.
그 중 정당매는 나와도 깊은 사연이 점철된 매화로 귀를 세웁니다.
내가 정당매를 제작(1998년) 한 시기 쯤
시인도 처음 단속사지를 찾아와 매화를 완상하고 시작(詩作)을 하였다니 말입니다.
그는 그 후 2003년 전주 모악산에서 하동으로 귀촌하였으니
한 그루의 매화를 사모한 시절인연이 이리 깊습니다.
▶단속사지 정당매, 1998년작
봄날이었네
두고 벼르던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 찾는 길
백석의 정한 갈매나무를 그려보던
두 눈 가득 기다리던 설렘이 내게도 있었네
거기 매화 한그루
한 세월 홀로 향기롭던 꽃그늘은 옛 시절의 풍경이었는가
두 탑만이 남아 있는 단속사지
텅 빈 그 꽃잎들
저 탑 위에도 꽃 사태는 일어 바람을 불러 모았으리
늙고 꺾인 수령 610년
잔설 같은 뼈만 남은 정당매여
네 앞에 서서 옛날을 기억해주랴 이름을 불러주랴
무상한 것들 어찌 사람의 일 뿐일까
산중에 홀로 누웠네
별이 뜨기도 했네 별이 지기도 했네
단속사지 정당매 / 박남준
우리는 날이 저물기 전에 꽃자리를 털고 일어나 덕산의 남명매를 찾아갔어요.
다시 천왕봉을 우러러보고 매화나무아래에서 서성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남명! 그 선비정신을 새삼 떠올리며.
우리가 이 난국의 시대에 임해야 할 각자의 소명은 무엇인지?
가능만하다면 이 지리산의 청정한 기운을 모아 세상에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해 옵니다.
바라건대 다시는 이 같은 아픔의 봄을 맞이하지 않기를 소원하며.
▶남명매(화첩)
▶산천재와 남명매(화첩)
어느새 매화꽃이 지고 있습니다.
저 바람속의 꽃비는 내가 바라던 풍광이 결코 아닙니다.
관념이 아닌 오롯한 현실입니다.
슬픈 기억의 봄날입니다.
2020. 3. 20
'Culture > 이호신의 그림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다섯 번째 - 파초의 꿈 (0) | 2020.06.08 |
---|---|
열세 번째 - 산청 율수원의 정월 대보름 (0) | 2020.02.19 |
열두 번째 - 유네스코 세계유산-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서 (0) | 2019.12.12 |
열한 번째 - 다시 용유담(龍遊潭)에서 (0) | 2019.11.04 |
열 번째 - 설악산의 폭포바람 (0) | 2019.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