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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이호신의 그림편지

열다섯 번째 - 파초의 꿈

노마드 뷰 2020. 6. 8. 17:09

열다섯 번째. 파초의 꿈

 

 

        불꽃처럼 살아야 해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에 풀잎처럼 우리 쓰러지지 말아야해

        모르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행여나 돌아서서 우리 미워하지 말아야해

        하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날까지

        순하고 아름답게 오늘을 살아야해

        정열과 욕망 속에 지쳐버린 나그네야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을 아오.

 

         ‘파초’(이건우 작사 / 수와진 노래)

    

 

초여름 마당의 파초를 바라보다 생각나는 노래입니다.

이 가사 중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을 아오 에 추억이 아련합니다.

오래전 탄자니아와 인도의 인연으로 이국땅에서 만난

수많은 야자수들의 환영(幻影)이 떠오른 것이지요.

작열하는 태양아래 비를 기다리는 식물은 하늘을 마시고픈 열망으로 가득했어요.

또 그 너른 잎의 너울거림은 시원하고 마음은 창공을 차오르게 하였으니.

해서 문정선이 노래한 파초의 꿈도 그려집니다.

 

~ 태양의 언덕위에 꿈을 심으면 파초의 푸른 꿈은 이뤄지겠지 ~

 

                                          

 ▶ 태양과 파초,60×90cm,2020.

  

하지만 나의 꿈은 태양의 언덕이 아닌 화실뜨락에서 파초를 만나는 일이지요.

이 소망은 귀촌 후 2(2012)만에 이루어 졌어요.

제주에 사는 양춘선 님이 보내준 수선화와 파초 뿌리입니다.

그 해 이른 봄에 심은 파초는 어김없이 푸른 나래를 허공에 펼쳤어요.

그 기쁨을 화첩에 담으며 이국에서의 추억도 기리고.

 

그런데 그해 겨울 눈서리를 맞게 두어 파초는 죽고 말았어요,

스무 해 전 제주기행에서 만난 인연으로 해마다 귤을 보내주는 이에게 송구하기 이를 때 없었구요.

거듭 자신의 불찰을 한탄했지요.

화첩을 보면서 자꾸 그리워지기는 마치 어미소가 망아지를 잃은 심정으로.

 

이 허전함은 마을 산 전망대 길목에서 만나는 이미연 씨 댁의 파초를 볼 때 마다 환기되었어요.

결국 무성한 여러 파초 중 어린 것을 하나 얻어 작년(2019)에 심으니 일곱 해 만입니다.

이번에는 잘 키우려고 지난 늦가을에 밑동을 자르고 보온 천과 비닐로 덮었지요.

그리고 꽃말처럼 신선한 모습과 긴 기다림이 있었으니...

    

 

수상한 시절, 코로나의 열병 속에서도 마침내 대지를 뚫고 나오는 파초의 촉!

매일 눈만 뜨면 달려가 눈도장을 찍었지요.

밤새 연인을 연모하다 해후하는 듯이.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파초그림에 대한 열망은 따로 있었답니다.

조지훈 시인의 파초우(芭蕉雨 )’를 애송하며 이에 걸 맞는 뜻그림을 그리고 싶었기에.

이 시의 이미지가 화실 창에 스크린처럼 비껴 간지가 실로 여러 해였지요.

그렇게나 망설이고 또 음미하기를 거듭하다 먹을 갈고 붓을 듭니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이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던고.

    

 

 

▶ 파초의 꿈, 93×60cm, 2020. 

  

 

파초 그림 중 미술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18세기 정조대왕의 <파초도> (84.7x51.5cm,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입니다.

그림은 괴석(怪石)과 함께 군왕의 위엄과 기상이 드러난다고 하지요.

식물과 바위의 소재는 이질감 속에 조화의 화면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한 소재가 작가의 심회(心懷)에 따라 드러나는 현상을 일러 사의(寫意)라고 해요.

해서 마당의 파초를 사생하고 마음결에 품었다가 붓길을 달리는 일.

녹음이 짙어가는 산을 바라보며 스쳐간 나의 꿈을 파초에 실어 봅니다.

초여름 훈풍속에 파초의 선물!

서로 주고받으며 인사 나눕니다.

    

2020. 6.

 

 

 

 

▶ 파초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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