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Culture /테마기행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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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이야기,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1786년 봄 어느 날, 남원 유천마을. 혼례식을 끝내고 하객들을 물리친 첫날 밤,종이와 붓에 먹을 갈아 놓고, 이제 막 부부가 된 두 사람이 다시 은밀한 언약식을 갖는다.서로 묻고 답하여 적어 둔 것이다. 신랑이 먼저 묻는다. “종신(終身)토록 나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아비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따를 수 있다는 것이오?” 그 질문에 신부가 미소를 흘렸을까, 잠시 후 입을 열어 답한다. “명(明)나라 사정옥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부의 도는 오륜(五倫)을 두루 겸한 것으로 아비에게는 간언(諫言)하는 아들이 있고, 임금에게는 간쟁(諫爭)하는 신하가 있으며, 형제는 서로 정도(正道)로써 권면하고, 붕우는 서로 선행으로 권유하니 어찌 유독 부부 사이만 그..
테마기행 / 네번 째 ‣ 고하도 고하도는 목포항에서 1.2km쯤 떨어져 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차로 오갈 수 있는 섬이다.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닮은 정조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산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 2절이다. 문일석은 왜 이런 가사를 썼을까?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라면, 그 다음에 나오는 ‘님’은 과연 누굴까? 문일석이 이 가사를 썼던 1934년은 일제 파쇼 통치기로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고하모 모충각에 모신 이순신장군 영정 문일석의 그리운 님. 물론 문일석만이 그리워했던 님은 아닐 것이었다. 당시 한민족이라면 누군들 이 님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일제에게 토지를 수탈 당하고, 도로공사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목화 따는 일에 ..
.3 유달산에 남긴 일제의 흔적 . 이난영의 친 오빠인 이봉룡이 쓴 이 곡은 전편인 에 나왔던 지명과 정서가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리고 ‘목포는 항구’라는 내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목포는 항구다. 항구며, 안개 속에서 기적이 우는 곳,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이별의 슬픔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목포는 항구다’에는 항구가 뜻하는 한과 꺾이지 않는 저항의식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은 정신이 노래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유달산의 유선각은 이 발표되기 3년 전에 세워졌다. 개항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1935년, 목포는 이난영을 통해 삼백년 원한을 왜 다시 되새김질 하고 있었던 것일까? 유달산에 그 답이 되는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오포유달산에 있는 오포. 정오에 포..
목포의 눈물 - ‘삼백년 원한 품은‘이 ‘삼백연 원한 풍은’이 된 사연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육전거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목화공장에서 일하던 그녀는 열여섯 살에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막간 가수로 처음 무대에 섰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손목인이 작곡하고, 문일석이 가사를 쓴 이 1935년에 발표된다. 목포의 애국가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90년대 까지 호남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가 승리를 거둘 때마다 팬들이 목 놓아 합창한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단지 응원가만이 아니었다. 한(恨)과 설움으로 살아온 이 땅의 사람..
.1근대도시, 목포의 시작 땅끝까지 달려온 기차. 1914년 1월 11일 개통되어 100년이 넘게 호남의 젖줄이 되어온 호남선. 그 마지막 역이 이곳 목포다. 70년대엔 목포역에 기차가 도착하면 플랫폼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많았던 도시, 목포. 그러나 도시의 눈물은 벽장 속 깊은 곳에 간직한 낡은 흑백사진처럼 흐려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져 갔다.[목포역 플랫폼 사진]목포는 무엇이든 흘러와 고이는 곳이다. 종착역이란 그런 곳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된 뒤, 30년 동안 호남의 비옥한 땅에서 실려 온 쌀이 바로 이곳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떠났다. 그 수탈의 고통에 이르면 ‘목포의 눈물’은 더욱 진해진다. 하지만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목포만..